20여 년 전 모교인 성주의 초전초등학교에 가서 강연을 하고 질문을 받을 때, 한 학생이 공학박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되는지를 물었는데, 똑같은 질문이 그 후 에도 같은 장소에서 있었고, 어느 경우에도 나는 “정직하게, 열심히, 용감하게” 하고싶은 일을 하다 보면, 박사도 될 수 있고 그 밖의 다른 목표도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하였었다. 그리고 10여년 전에는 초전초등의 4, 5, 6 학년의 여섯명의 학생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공통된 사연중의 하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보다 자세히 알고싶다는 것이었다. 또한 동아일보 최수묵 기자의 부탁으로 쓴 “나의 젊은 시절” 이 신문에 실렸을 때, 한 주부가 그 글을 자기 애 들에게 강제로 읽혔다는 말을 듣고, 내가 겪은 60년 간의 경험을 가능한 한 기록에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. 다만 글 쓸 틈을 내지 못하고 있다가 25년 간 몸담고 있던 KIST 의 시스템공학연구소 의 소장 직에서 물러난 다음부터 속도가 붙어 일사천리로 탈고하게 되었다.
 
인생은 한번뿐이어서 이미 지나간 시행착오들을 나열하는 것이, 나 자신에게는 별 뜻이 없지만, 지난 날 보다 앞날이 창창한 후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큰 기쁨이라 하겠다. 가장 후회 스러웠던 일을 한가지만 든다면, 그것은 중2 때 학업에 전념하지 못하고 폭력적인 좌경학생운동에 가담한 것이라 하겠다. 이것이 불행의 씨앗이 되어, 나는 길일성 북한 정권의 6-25 불법 남침이라는 더 큰 폭력에 휘말려서 남달리 곤욕을 치루었던 것이다. 아버지와 형과 자형이 비명횡사하는 민족상잔의 불행까지 당하여, 오랫동안 가난과 병고에 시달렸으나, 절망하지 아니하고, 그야말로 “열심히, 정직하게, 용감하게” 노력해서 역경을 벗어났고, 무작정 상경 후 고학으로 서울 공대, 공군장교, 하바드 대 기계공학 박사 가 될 때까지, 무학력 노동자의 한풀이를 한 셈이다.
 
미국 유학 때 또 하나 배운 것은, 자유 민주주의 와 시장경제가 인간적이고 활기에 넘치는 것에 비해서, 내가 중2 의 어린 나이로 한때 신봉했던 평등사회, 공산주의 가 오히려 비인간적이고 활기 없는 사회를 만들게 된다는 것이었다. 이것은 동유럽 공산 국가 들의 붕괴가 더욱 확실하게 입증하고 있다.
 
귀국 후 활동한 것이 어언 40년 간이 되었다. 오늘과 같은 고도산업화/정보화시대를 감안하면,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컴퓨터교육과 전산화는 진행되었을 것이다. 그렇지만 만약 1963년 내가 귀국 직전에 하바드 연구실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컴퓨터와의 인연이 없었더라면, 나의 인생과 한국의 정보화는 또 다른 길을 찾아갔을지도 모른다.
1960년대 초, 컴퓨터를 이 땅에 소개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1988년에 세계 정상급 슈퍼컴퓨터를 들여오기까지 나는 숙명적으로 그 중심부에 있었다. 종로에서 홍릉으로 또 대덕연구단지로 이사를 다니며, 다섯 번이나 바뀐 연구소의 이름에도 흔들리지 않고 연구원들과 난관을 뚫고 나갔다. 그 힘의 밑바닥에는 우리 스스로의 열정과 사명감, 애국적인 자존심이 있었으며, <다른 어떤 것도 열심히 일하는 것과 바꿀 수 없다>는 일관된 신념이 깔려있었다.
 
어떻게 보면, 수십 년 간 한 길을 걸을 수 있었다는 자체는 대단히 행복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. 그러나 그 과정에는 말할 수 없는 고뇌와 결단의 어려움 들이 세월이란 이름으로 다 녹아 들어갔다. 나는 <컴퓨터혁명>을 통해 한 발짝이라도 더 빨리 우리나라를 정보화시대로 진입시켜 보려 했던 것이다. 오직 그것만이 내가 조국을 위해 할 일이라고 오래 전부터 다짐해 왔기 때문이다. 나의 목표와 구상을 적극 이해하고 밀어준 소수의 선각자들과 열정을 갖고 함께 일한 수 천명의 젊은이들이 있었는가 하면,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간섭과 질시와 경쟁이 있었다.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<보이지 않는 손>이 되어 한국을 정보화 선진국으로 변모 시키는데에 밑거름의 일부가 되었다고 자부한다.
 
나는 이 개인 Home Page 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“정직” “성실” “용기” 이 세 가지 가치를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을 말하고 싶다.
 
이 Home Page 를 6-25 때 비명에 가신 아버지, 형님, 자형, 한을 품고 고생하시다 합류하신 어머니, 그리고 영문도 모른 체 어린 나이에 간 친구 백서흠, 박찬수 와 다른 마을에서 비슷하게 희생된 수많은(200만?) 원혼들의 명복을 위해서 바치는 바이다.
 
이 Home Page 가 완성되기까지 산파역을 도맡아 준 시스템공학연구소의 후학들, 특히 10년 전인 1993년 본인의 회갑기념집을 출간하기 위해 만들어진 「회갑기념 행사준비위원회」 회장인 최덕규 박사를 비롯 이단형, 조맹섭, 이춘희 박사 등의 우의에 감사하며, Home Page 구축에 큰 도움을 준 누리미디어 최순일 사장 과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의 장익 박사의 노고에 고마움을 드린다.
 
2003년 11월
성기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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